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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야스오(小林保雄, 1936년~). 일본의 아이키도가合気道家. 아이키카이合気会 8단. 1954년 아이키카이 본부도장에 입문, 아이키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의 내제자가 됨. 1969년 도쿄도 고다이라에 고바야시 도장을 창설.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은 1987년 일본무도협의회로부터 우량단체 표창을 받았으며, 2017년 현재 일본 내 130여 개의 도장, 한국, 미국, 캐나다, 스웨덴 등 20개국에 지도부원을 파견하고 있다.

Guillaume Erard: 아이키도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Kobayashi Yasuo: 원래 강도관講道館 유도를 했어요.치요다구 야스킨자 앞 쿠단에(강도관, 1934년)스이도바시에 있던 강도관이 가까워서어릴 때부터 쭉 다녔죠.(강도관, 1934년)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지금은 돌아가셨을 텐데,거합도연맹 회장이셨던 단자키(토모아키) 씨라고계셨는데, 스모 선수였기도 하셨죠.그분 아들과 친구였어요.스모 선수였기 때문에 우에시바 선생(사진 우측)과그가 던졌던 텐류(사진 가운데) 등 유명 선수와잘 알았고, (합기회) 본부도장에 자주 출입했어요.그런 연유로 초대를 받아서 견학을 하러 갔죠.저녁 5, 6시에 당시 3단이었던 타다(히로시) 선생이지도하고 계셨는데,대여섯 명이 수련하고 있었어요.도장은 여전히 (전쟁으로) 탄 자국이 남아있고,이재민이 한쪽에서 살고 있었죠.1/3은 그들이 살고, 아래쪽은 도장이고.그런 시절이었어요.아이키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절이었죠.그때 고3 가을이었는데, 타다 선생이맘에 들면 또 와'라고 하셨어요.다음해 대학에 들어가 4월에 입문했죠.그렇게 아이키도를 알게 되었어요.당시에 아이키도와 대동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고류유술古流柔術의 존재는 세간에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유도, 검도라든가 가라데는 알려져 있었지만요.그리고, 프로레슬링이 아주 유행했었죠.소위 고류유술은 일반적이지 않았어요.아이키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죠.제가 입문한 게 1955년 4월이었는데,아이키도가 일반에 공개된 게 그해 9월,타카시마야 백화점 옥상에서 였어요.저는 막 입문했던지라 짐을 옮기거나 하는 걸 도왔어요.그게 첫 외부 공개였어요.이와마에서는 입문서에 '대동류 합기유술'이라고

Guillaume Erard: 쓰인 적이 많았는데, 도쿄도 역시 그랬나요?

Kobayashi Yasuo: (도쿄) 본부도장의 경우, 지금과 같이입문서를 쓰고 입문하는 식이었어요.특별히 (영명록 등의) 장부에 기록하거나하지는 않았어요.

Guillaume Erard: 당시 본부도장에서는 누가 지도했나요?

Kobayashi Yasuo: 제가 입문한 게 1955년, 그러니까 쇼와30년이네요.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0년째였죠.아직 아이키도가 한 클래스 당 5, 6명 밖에 없던 시절.(우에시바 깃쇼마루, 오사카 상사 앞. 1950년)깃쇼마루 선생도 아직 증권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죠.(우에시바 깃쇼마루, 오사카 상사 앞. 1950년)당시에 대리 지도를 하던 게 타다 선생이었어요.(타다 히로시, 본부도장에서)그게 2년 후, 그러니까... 1957년 무렵에,깃쇼마루 선생이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고)아이키도 전문이 되었죠.그때부터 수업이 많아졌어요.퍼지기 시작했죠.수업이 아침 6시 반이랑 밤 밖에 없었어요.그게 지금처럼 1일 5회가 된 게깃쇼마루 선생이 회사를 그만두면서부터예요.

Guillaume Erard: 본부도장 내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뭔가요?

Kobayashi Yasuo: 별로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집이 가까웠으니까.아이키도를 입문했을 때 유도도 하고 있었고,당시 강도관은 (이미) 큰 조직이었으니서로 교제가 친밀하지 못했지만,본부도장은 아직 작았어요.끝나고 나서 차를 마시거나, 연습을 더 하거나,서예를 한다거나,저녁에는 술을 마시러 가거나 하면서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다른 내제자들은 모두 지방 출신이었어요.같은 또래인데도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고개성도 강하고,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그게 강도관(유도)를 그만두고아이키도에 정착한 이유예요.당시 내제자들과의 친교때문이죠.

Guillaume Erard: 내제자 생활은 어떤 것이었나요?

Kobayashi Yasuo: 엉망진창이었죠.수련만 마치면 뭘 해도 괜찮으니술을 마시거나...물론 청소나 장보기는 했지요.(본부도장, 1950년)(남는 시간에) 수련할 장소도 없었어요.사람들이 거기서 얼쩡거리고 있었으니까.스모나 팔씨름을 하거나,저녁이 되면 가까운 신주쿠에 술 마시러 가거나.선후배 사이니까(본부도장, 1955년. 사진 맨오른쪽이 고바야시 선생)돈은 주로 선배가 냈죠.누가 부모님에게서 용돈이라도 받으면마시러 가자'거기서 생활하는 건 최소한 식사나 그런 걸우에시바 큰선생과 함께 하는,그런 시절이기도 했어요.먹는 거만 해결되면 수련은 걱정하지 않았어요.

Guillaume Erard: 수련은 어떠했나요?

Kobayashi Yasuo: 다들 젊었으니까 거칠었죠.기술 안 걸렸어', '지고 싶지 않아' 하면서누가 더 잘 참는지 겨루는 식이었죠.저는 몸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상대를 지치게 하려고 빙글빙글 돌았어요.던져지면 바로 일어나고.그게 지금 보면 단련이라는 면에서좋았다고 생각해요.

Guillaume Erard: 가장 영향을 받은 선생은 누구신가요?

Kobayashi Yasuo: 선생마다 사고방식도 다르고 하니,좋은 점, 나와는 안 맞는 점 등을 다양한 선생을 접하면서(본부도장 지도부, 1961년)지금의 제가 되었죠.기술이 아직 통일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오히려 아이키도가 발전한 게 아닐까...도헤이 고이치 선생의 조수는 10년 이상 했어요.(도헤이 고이치 선생(중앙), 고바야시 선생(오른쪽))그런 이력도 있습니다.도헤이 선생의 발상도 훌륭했지요.하지만,제 부모님은 장사를 하셨는데, 그분들을 옆에서 보면서 익힌 게 있지요.도헤이 선생이 근본인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무단으로 독립해서 나가버린 데는 반감을 가졌어요.그래서 저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본부에 남았어요.도헤이 선생이 본부를 그만두고 나간 게3월 31일이었는데,(도헤이 고이치, 고바야시 야스오)도헤이 선생과 그를 따르는 지도원들이 나갈 때저는 사무실에 남아 앉아 있었는데,깃쇼마루 선생이 '아니, 고바야시, 남아준 건가'할 정도였어요.도헤이 선생의 조수를 했으니당연히 따라가리라 생각하셨던 거죠.부모님에게서 얻은 가르침 덕분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그러니 근본을 소중히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Guillaume Erard: 당시 승단 심사는 어떤 식이었나요?

Kobayashi Yasuo: 제가 있을 때는 단 제도가 없었어요.그래서 심사를 보지도 않았죠.1년 지나서 신년회에서 '넌 초단', '넌 2단' 하면서갑자기 호명하는 식이었어요.사람이 늘면서 심사제도를 도입하게 된 겁니다.

Guillaume Erard: 큰선생이 단위를 더이상 수여하지 않던 상태였는데,창시자의 내제자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Kobayashi Yasuo: 뭐 사람의 자유이니, 그가 존경을 표하기만 한다면야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수행이란 측면에서는 다양한 생각이 있으니까,몇 년'이란 기간은...음,강습회에서나 어쩌다 보는,지방은 거의 그런 식이죠.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으니선생이 전국을 돌아다녔죠.년 1회, 3월 정도에 1주일 정도 본부가 수업을 중단하고큰선생의 수업만 하던 시기가 잠깐 있었어요.그때만 참가하던 선생도 있고.잘 모르겠어요.저로서야 본부도장에서 우에시바 선생의문하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Guillaume Erard: 전일본합기도연무대회2017년 5월, 일본무도관유럽에 아이키도를 전파한 모치즈키 미노루 선생이나아베 타다시 선생을 만나신 적이 있나요?

Kobayashi Yasuo: 모치즈키 미노루 선생은 제가 메이지대학 아이키도부를막 만들었을 때1년인가 2년 아래인 친구의 아버지였어요.그런 연유로 대학 합숙을 2번 정도 시즈오카에 있는모치즈키 선생의 도장에서 하기도 했어요.그래서 모치즈키 선생이 본부도장에 오셔도 아는 사람이 저 밖에 없어서제게 잘 대해주셨어요.모치즈키 선생님은 강도관의 카노 선생의 명으로합기회에 파견되었죠.우에시바가 여기 와서 가르치지 않을 테니네가 가서 배워와라'해서 오신 분이죠.기본적으로 유도인이셨으니, 해외에 갔을 때아이키도로 유도를 대처하려면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그게 우에시바 선생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고 봐요.아베 선생이야 조금만 화나면 싸움을 걸거나 했고,해외에서도 여러 일을 벌였는데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전혀 모르는 곳에 가서아이키도를 전파할 수 있지 않았을까.우연하게도 두 분 선생과 길진 않지만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는데,저 정도는 되야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선생님이나 동료가 그분들처럼

Guillaume Erard: 해외에 나갈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Kobayashi Yasuo: 다른 사람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에 나갔지만,저는 아이키도 수련 자체가 좋았기 때문에별로 생각이 없었어요.당시 사범부장이었던도헤이 고이치 선생에게 불려갔는데,미얀마, 당시에는 버마였는데,야마구치 선생이 먼저 갔었죠.(타다 히로시, 앙드레 노케, 야마구치 세이고)일본이 세계대전으로 타국에 많은 피해를 입혀 배상을 했죠.그 배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버마에 2년 정도조수 역할로 가지 않겠냐고 하더군요.뭐, 상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상관 없는 게 아니고!'라고 화를 내시더군요.갈 거야, 안 갈 거야!'라고 하셔서옛, 가겠습니다!'라고.하지만 가기 싫었어요.그래서 시간을 좀 끌었어요.대사관에 빨리 가라는 데도 안 가고.그런데 3개월 후에 쿠데다가 났어요.군 정부로 바뀌었죠.쿠데다가 일어난 후 외국인 선생은 안 받는다고 하더니거꾸로 군인 5명을 보내왔어요.유도와 아이키도를 하려고요.그 사람들을 챙겼죠.아, 이건 아직 일본에서 아이키도를 계속하라는계시인가 보다'하고 생각했어요.음... 저는 수련 그 자체가 좋았으니까요.제 도장을 열 때까지는 사람을 가르치겠다는생각도 별로 없었고요.그게 거꾸로 잘 풀려서 지금과 같이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솔직히 단언하건데, 해외에 나간 사람들은그리 오랜 기간 동안 수련하지 않았어요.30대, 40대에 나간 사람들은보통 10년 정도 한 사람들인데,하지만 그럼에도 해외에서 이 정도로 전파할 수 있었던 건단기간이지만 아주 힘든 수련과 다양한 체험 덕분이죠.그리고 그들의 재능도 있었을 테고요.그런데 재미있는 게 각 나라마다 개성이 있잖아요.프랑스는 꽤 사교적인데,아사이 선생이 있는 독일은 엄격하죠.자기랑 맞지 않는 나라에 간 선생들은쫓겨나거나 되돌아왔어요.다른 나라로 옮기기도 하고요.그런 일도 있어요.그러니까 지금 해외에 아직 남아있는 사범들이 있는데,그 나라에 잘 적응했거나, 서로 잘 맞는다거나 하는 거죠.맞지 않아 돌아온 사람도 아주 많아요.

Guillaume Erard: 앙드레 노케 씨를 아시나요?

Kobayashi Yasuo: 노케 씨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내제자가 된 사람이죠.같이 숙식하면서요.나이는 훨씬 위였어요. 40대였나.훌륭한 분이었어요. 2년 동안 열심히 했죠.아직 일본에서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그걸 2년 동안이나 저희와 같이 숙식했어요.대단한 사람이죠.

Guillaume Erard: 선생님께서는 큰선생의 아이키도가 얼마나 변화했는지 아시나요?

Kobayashi Yasuo: 내가 입문했을 때 우에시바 선생님은 70대였어요.여전히 정정하셨고 제압기를 많이 하셨죠.내가 처음 입문했을 때는 우리도 그런 걸 많이 했는데,어느 순간 큰선생이 변화하시기 시작했어요.나이가 드시면서,둥그런 원의 동작을 더 많이 하시기 시작했죠.본부도장에서는 깃쇼마루 선생이그러한 기술적 변화를 따라가기 시작했어요.게다가 당시 내제자였던 아리카와(사다테루) 선생,야마구치(세이고) 선생, 그리고 타다(히로시) 선생은...잠깐, 타다 선생은 도장에서 살지 않았고...어쨌든 그들 모두 서로 다른 스타일로 했어요.이와마의 사이토 선생은 매주 일요일에오셔서 지도하셨죠.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명확한 룰이 없었어요.사람들은 서로 다른 스타일로 지도받았죠.깃쇼마루 선생은 큰선생의 기술적 변화를따르고 보존했어요.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고 수련하면서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의 스타일을 따랐죠.저나 다른 내제자들은 모든 수업에 참가했기 때문에,흉내내는 데 아주 능숙해졌어요.당시에는 도헤이 코이치 선생처럼독특한 스타일의 선생들도 있었죠.기술에 있어서는 어떠한 규정도 없었고, 아마 그게아이키도가 이렇게 대중화된 이유가 아닌가 해요.
선생님의 자서전에는 큰선생은호흡던지기를 별로 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요.음... 호흡던지기...우에시바 선생님이 계실 때마다 우리는 좌기를 했어요.그래야 선생님이 기뻐하셨으니까.하지만 결국 수련은 지루해지기 일쑤였어요.1교나 2교 같은 제압기 위주였으니까.그래서 호흡던지기를 같이 하기 시작했죠.수신(낙법)을 좀더 다양하게 하고체력 향상을 위해서요.하지만 선생님은 화를 내셨죠.그런 걸 연습한다고 사람이 던져지냐?!고 소리치셨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련 방식이 유명해졌어요.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요.더 재미있기도 하고.우리는 1교, 2교, 3교, 사방던지기, 손목뒤집기 같은기술을 연습했는데,이건 어디까지나 선생님보다 젊은 사람들이수련의 방편으로 하던 게 정착된 거라 생각해요.그에 대해서 깃쇼마루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죠.야마구치 선생 같은 선배들 역시 그런 기술을 하셨어요.큰선생의 기술은 다른 사람들과

Guillaume Erard: 비교해 어떤 느낌이었나요?

Kobayashi Yasuo: 음, 무도인은 강하고 잘 단련된 몸을 갖고 있죠.제 시절에는 이미 서로 세게 잡기보다는흘리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70세 무렵 선생님은 여전히 강건하셨고,우리가 버틸라치면 세게 던지셨어요.그래서 그를 따라 흐르듯이 하게 된 거죠.그냥 그걸 보기만 한 사람들은그게 어떤 호흡법의 기술인양 이해했고,그걸 따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좀 곤란해요.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죠.그런 게 문제라고 여겨질 때가 있어요.사실 움직임 자체가 완전히 달라요.선생은 정말 잘 단련되어 있었거든요.사람들이 제대로 단련도 않고흉내내려는 건 문제예요.아이키도인 중 일부는 신체 단련을 소홀히 하는데요.

Guillaume Erard: 큰선생의 몸은 어떠했나요?

Kobayashi Yasuo: 음, 저녁에,선생의 몸을 안마하곤 했어요.그의 근육을 마사지하면,저보고 너무 살살 한다고 말씀하셨죠.연세에 비해 아주 잘 단련되어 있었어요.그의 근육을 마사지하는 게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요즘 사람들은 내면 수련에 대해 많이 말하는데요.

Guillaume Erard: 큰선생도 그러한 기술을 연구하셨나요?

Kobayashi Yasuo: 큰선생은 다양한 수련을 하셨죠.산을 오른다든가,홋카이도를 개척한다든가,오모토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 선생밑에서 종교적 수행을 한다든가.보통 그런 수행에는 좌선이 주로 사용되는데요.그게 그가 수련한 방법이 아닌가 해요.

Guillaume Erard: 그게 큰선생의 가르침 중 일부였나요?

Kobayashi Yasuo: 음, "헤-호, 헤-호"라 외치며토리후네(노젓기 운동)을 하든가,친콘(진혼) 동작을 하든가,검을 사용하거나,기를 단련하는 수련 몇가지를 하곤 했죠.신화에 대해 천착하셨어요.개인적으로는 그런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빨리 끝내시라고 속으로 빌고는 했죠.그런데 종교쪽 사람들이 여러 군데서 오기도 했어요.제가 거기 있을 때,무도계의 중진도 있었고,건강법 관련 사람들도 있었고,니시 요법이나 현미식 쪽 사람들.야마구치 선생도 그쪽에 어떤 관련이 있었다고 봐요.템푸카이(천풍회) 쪽 사람들이나.그런 특수한 계통 사람들이 많았어요.그런데 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1965년 무렵인 것 같은데,학생들이 더 많았어요.선생님 자신도 잇큐카이(일구회)나

Guillaume Erard: 템푸카이에 참석하셨죠?

Kobayashi Yasuo: 잇큐카이에서는 정좌하여 미소기(정화) 수련을 하거나,다른 단련을 강하게 했어요.잠깐 동안이지만 같이 했죠.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향을 피운 채 3일 동안 좌선만 하기도 했어요.누가 움직이면 등이나 무릎을 얻어맞았죠.집중적으로 인간의 근본을 수련하는데 유용했어요.템푸카이는 나카야마 템푸 선생이 이끌었는데,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적극적으로삶을 살도록 가르쳤어요.우리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해요.그런 사고법이 고바야시 도장을 확장할 때저를 도왔다고 봐요.

Guillaume Erard: 큰선생의 종교적 얘기를 이해하셨나요?

Kobayashi Yasuo: 음 저는 코지키(고사기) 같은 건 잘 몰라요.곤란했죠.빨리 끝났으면'하고만 생각했어요.그런 종교적인 얘기를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저는 안 그랬으니 그저 수련만 했죠.신들의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요.제가 하는 아이키도의 슬로건은 이거예요.한 사람이라도 더 아이키도를.큰선생은 연무에서 자신의 진짜 기술을

Guillaume Erard: 공개적으로 보이셨나요?

Kobayashi Yasuo: 완전히 같았어요.평소 지도하시는 것 그대로 무대에서 하셨어요.다른 부분은 전혀 없었어요.떨어져서 보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죠.연무 중에 강론을 하시기도 했어요.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셔서 저희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죠.하지만 연무 중에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그나마 나았어요.평소 수업 중에는 1시간 동안 얘기하실 때도 있었어요.연무 중에는 그러시지 못했죠.말씀 약간, 연무 약간.하시는 것은 평소와 똑같았어요.하지만 관중들은 평소 자주 보던 게 아니면다르다고 볼 수도 있었겠죠.오늘날의 아이키도는 선생님께서 시작하시던

Guillaume Erard: 당시의 것과 많이 다른가요?

Kobayashi Yasuo: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아요.하지만 당시는 움직임이 적었어요.제압기 위주였어요.사람들은 비교하길 좋아하지만저는 그저 기본을 할 뿐이에요.저는 그저 기본을 할 뿐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가하지 않아요.선생마다 스타일이 다르죠.본부도 그렇잖아요?다른 선생들이 많이 있고,모리테루 선생은 기본을 가르치죠.

Guillaume Erard: 큰선생의 무기 수련 경험에 대해 아시나요?

Kobayashi Yasuo: 그건 저보다 과거의 일이라 잘 모릅니다.그리고 그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어요.큰선생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카타를 계속 바꾸셨어요.그걸 이와마의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이 체계화하셨죠.일요일마다 가르치셨어요.아니면 그가 일하던 국철에서 비번일 때요.당시에는 본부도장에서 자주 가르치셨어요.다른 선생들 같은 경우 카토리(신토류)나다른 걸 도입하거나 한 사람이 많지만,저는 그저 사이토 선생이 가르쳐준기본만 충실히 따랐어요.

Guillaume Erard: 무기술을 가르치시나요?

Kobayashi Yasuo: 저는 체술을 더 좋아해요.장(杖)을 가지고 일반인은 현혹시킬 수있겠지만,다른 사람 앞에서, 특히 무도가 앞에서는절대 하지 않아요.그래서 도장에서는 하지만 연무에서는 보이지 않아요.연무대회에서 장이나 검을 갖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체술만 했죠.체술을 좋아하니까.하지만 수련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무기술을 도입했죠.하지만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요.서툴러요.다른 무도가의 관점에서 비판받거나 하고 싶지 않아요.강습회나 연무대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않죠.전일본대회에서 검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저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Guillaume Erard: 지도를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Kobayashi Yasuo: 이걸 열고 한때 방황한 적이 있어요.무도가로서, 그런 길만 걸을 것인가,아니면 일반을 위해 부흥시킬 것인가.하지만 나는 평소 지론이 '스스로 생각하자'예요.여기 도장을 열었을 때가,당시 '안보 소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어학생들이 갈 곳을 잃은 상태었어요.그래서 이 학생들을 불러들였죠.10~20명이 여기서 먹고 마시고 했어요.그 돈을 내야 될 때가 되자몇몇이 도장에 입문하였고,그게 고바야시 도장의 시작이에요.그때부터 사람이 늘어났고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일만 했어요.저는 어려운 얘기나 설교는 전혀 안 했고,기술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도 하지 않았어요.그런데 사람이 늘어나니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Guillaume Erard: 그렇잖아요?

Kobayashi Yasuo: 외국에서도 똑같아요.하지만 신기하게도 늘고 있으니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싶죠.

Guillaume Erard: 어떤 식으로 도장이 성장했나요?

Kobayashi Yasuo: 나와 아들 히로아키만으로 시작한 다음학생 몇몇이 오기 시작했어요.그리고 지금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고마운 것이도장을 지었으니 쓰라'며 제공해주신다든지,땅이 있는데 쓰라'며 도장을 짓게 허락해준다든지,(최초의 고바야시 도장. 1969년)그런 분이 대여섯 계셨어요.아마도 제가 아이키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마음에 드셨던 건지도 모르죠.그런 분이 5, 6명 계셨고그걸 기반으로 지금까지 발전한 거예요.저는 당시 고다이라 도장과 도코로자와 도장에서지도했어요.수, 금은 여기서, 화, 목은 저기서, 이런 식으로요.그런데 사람이 늘어나면서이가라시(카즈오) 같은 내제자도 생기고.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게 잘 풀린 건호의를 배푼 분이 계시고일을 그만두고 내제자가 된 사람들이있었던 덕분이죠.저는 아이키도를 하면서 새로운 걸 많이 시도했어요.

Guillaume Erard: JICA 같이 해외청년교육봉사단이 있잖아요?

Kobayashi Yasuo: 그것도 고바야시 도장이 맨처음 참가했어요.심사를 본부도장을 빌려서 하는 곳도고바야시 도장뿐이에요.그런 면에서 우리는 새로운 걸 많이 하고 있어요.

Guillaume Erard: 고바야시 도장은 세계 몇개국에 있나요?

Kobayashi Yasuo: 40개국, 아니 더 많으려나?요즘은 그 수를 세지 않아서.내 80세 생일 당시에 왔던 게 40개국 정도였나.50개국 이상은 될 거예요.

Guillaume Erard: 상당히 큰 규모의 조직인데,승급, 승단은 어떻게 하시나요?

Kobayashi Yasuo: 단(段) 제도가 있는데, 도장이 여러 군데 있지요.처음에는 도장별로 했어요.고다이라는 고다이라, 도코로자와는 도코로자와,하치오지는 하치오지. 이런 식으로요.

Guillaume Erard: 그렇게 하니 사람이 적잖아요?

Kobayashi Yasuo: 우리가 항상 직접 가르치고 있으니이 기술이 오늘은 안 되지만 내일은 되겠지.'라는 식으로내버려뒀어요.그런데 지도원이 늘면서 지역 격차가 생겼어요.사람이 적으니 떨어뜨리면 불쌍하니까심사만 보면 합격하는 식이 되었어요.그리고 고바야시 도장 초단, 이가라시 도장 초단,호리코시 도장 초단이 있다 쳤을 때,레벨 차이가 있는 거 아냐?'하는 말도 나오기 시작했어요.그래서 날을 잡아 본부도장에 모두 모이게 했어요.내 앞에서 기술을 보이게 한 다음50%를 불합격시켰어요.

Guillaume Erard: 떨어진 사람이 많잖아요?

Kobayashi Yasuo: 지역 도장에서 지도하는 사람이내 체면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불평하면서고바야시 도장에서 나가겠소.'라고 하기도 했죠.저는 '그래, 그래, 알았어'라고 했죠.그리고는 그 다음 심사에서 다시 반을 떨어뜨렸어요.타협하지 않은 건데, 오히려 나은 결과를 가져왔어요.선생님이 진심인가 보다'라고 받아들였으니.선생님이 진심이야'라면서거꾸로 모두가 따라와주어서지금까지 발전한 거죠.그냥 심사를 보기만 해도 붙여주었다 해도,떠날 놈이야 마음에 안 들면 어쨌든 떠났을 테고,저야 '어차피 아들 히로아키와 단 둘이 시작했으니,처음부터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지'라고 생각했고요.그게 거꾸로 사람들을 감격시킨 것 같아요.두 번째 심사에서도 반을 떨어뜨리려 하니사람들이 반대했는데,레벨 차가 너무 나서 절대 합격 못시킨다'고제가 강하게 말했어요.그런데 아무도 떠나지 않았어요.세상 일이 참 신기하죠.안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지'라는각오가 필요해요.

Guillaume Erard: 어떻게 아이키도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전파한 거죠?

Kobayashi Yasuo: 나는 이상만 말하지 않아요.실천하려 노력하죠.무수비(결연) 기금'도 만들어운영하고 있어요.저쪽 도장 신문에도 나오는데,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사람을 위해고바야시 도장에서 비용을 대는 제도가 있어요.

Guillaume Erard: 아이키도 인구의 고령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Kobayashi Yasuo: 젊은이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몰라요.시합이 없으니까.강한 자가 이긴다거나, 승패가 갈리는 걸 원하죠.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게 되는시기가 오고, 그런 사람이 아이키도를 하게 돼요.제 시절에는 아이키도가 드물었어요.하지만 요즘은 정보화 시대라 여러 가지가 있고.

Guillaume Erard: 현재 주짓수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잖아요?

Kobayashi Yasuo: 아이키도도 그러한 흐름 중에 하나예요.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하러 오니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젊은 사람의 관심이 적은 건 사실이죠.인구가 줄고 있기도 하고.미국이나 유럽도 강습회에서 보면연배가 있는 사람이 많아요.그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해요.젊은 사람이 다른 무도나 운동을 하다가여기에 흥미를 갖고 입문하는 시기가 온다고 봐요.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Guillaume Erard: 고바야시 도장의 장기 계획은 무엇인가요?

Kobayashi Yasuo: 오늘처럼 사람들이 모두 사이 좋게즐겁게 수련하는 것.그러면서 서로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누는 것.사람마다 레벨이 다르죠.30년, 40년, 50년 한 사람도 있고 초심자도 있고.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앞에서는 전혀 기술을 설명하지 않아요.직접 시도해보고, 안 되면 선배가 가르쳐 줄 테니까.해외에 가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가르쳐요.선생님, 설명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그냥 보면 알잖아.'라고 답하죠.그래서 저는 통역이 필요없어요.하지만 모두 즐겁게 하고 있으니그걸로 된 거 아닐까 해요.그러면서도 널리 퍼지고 있고.(국제우주정거장에서 고바야시 선생의족자를 펼쳐놓은 제자들. 2009년)지금은 교류하는 시대잖아요.오고 싶은 사람이 와서서로 배우는.해외에도 7, 8단 선생이 적으나마 있고.젊은이들이 오가면서 함께 즐기면서우에시바 선생의 가르침을 알고.여기를 잡든 저기를 잡든 조금 차이가 나도손목뒤집기는 손목뒤집기예요.이걸 사방던지기라고 하면 좀 곤란하지만.그걸로 괜찮지 않나 싶어요.그런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널리 퍼지고 있으니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싶어요.

한국어 번역, 자막 : 성주환 AikidoK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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